캄캄한 무대 위에 은은한 안개가 피어오르고, 한 줄기 푸른빛이 중앙에 서 있는 한 소년을 비췄다. 그의 눈동자는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선명한 기억보다도 흐릿한 조각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학생들의 시선이 숨죽인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자, 꿈 연기 학교의 교사인 류한 선생님은 조용히 걸어가며 입꼬리에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무대는 단순히 누군가의 기억을 그대로 옮기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잊혀져버린 꿈의 빈틈을 상상으로 덮고, 잃어버린 감정의 결을 재생하여, 마침내 그 꿈이 다시 살아 숨 쉬는 자리이지.”
꿈 연기 학교 ‘누림극단’은 마법과 예술이 수놓은 하늘 아래 자리한 비밀스러운 무대였다. 이곳 학생들은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타인의 꿈에 깃든 감정의 파편을 읽고, 깨어난 무의식의 메시지를 심도 있게 해석해 무대 위에 구현하는 ‘꿈 연기자’로 육성된다. 꿈이란 본디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불과하고, 그 안에는 개인이 가둬놓은 감정과 무의식의 아카이브가 널려 있었다. 잊힌, 혹은 왜곡된 꿈의 잔상을 복원하고 완성하는 일은 이 학교의 본질이었다. 그리고 그 든든한 중심에는 류한 선생님이 있었다.
류한은 연기와 마법 교육에 대한 엄격한 관념을 가진 동시에, 학생 개개인의 내면을 세심히 들여다보는 치유자였다. 학생들에게 누군가의 잊힌 꿈 속 빈칸을 상상으로 채우는 훈련을 시키는 이유는 명확했다. “타인의 내밀한 무의식을 침범한다는 건 곧 타인의 감정에 동시에 내몰리는 일이며, 이는 아픈 경험을 이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빈칸을 채우는 창의는 단순한 상상력 이상의 공감 능력이고, 상상력의 확장 속에서 치유의 씨앗 또한 피어난다.”
그 날 수업의 주제는 ‘잊힌 꿈의 조각, 상상으로 완성하기’였다. 한 명씩 무대에 올라 은유적 이미지로 표현된 꿈의 폐허 앞에 서서, 전달받은 조각 난 기억을 이어가는 과업이었다. 첫 번째 학생은 조용히 무대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이름은 서연, 내성적이지만 깊고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학생이었다. 꿈 속 주인공은 어린 시절 사고로 기억을 일부 잃었다는 설정이었다. 무대 위에는 쓰러진 나무와 흩어진 종이 조각들만이 달랑 놓여 있었다.
서연은 숨을 고르고, 가벼운 몸짓으로 무채색의 공간에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녀가 연기한 꿈의 주인공은 ‘기억의 강’을 건너야 했고, 그 강은 차가운 물줄기였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사라진 기억은 단지 잃어버린 사실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진 감정의 회랑, 부재했던 유년의 웃음과 눈물이 터져 나오는 공허였다. 서연은 연극적 상징과 신비한 마법적 동작을 덧입어, 그 강물 위에서 잠시 멈춰 선 인물의 고독과 간절함을 형상화했다. 관객들은 서서히 그 빈칸이 한 편의 서정을 띠며 완성되는 것을 직관했다.
두 번째 학생 지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의 꿈 연기는 거칠고 역동적이었다. 그는 무대 한가운데 쌓인 부서진 시계 여러 개를 바라보며 그 잊힌 꿈 속에서 시간이 왜곡된 채 멈춰 있음을 직감했다. 지호의 연기는 시간의 조작과 파편화된 기억의 비트 같은 흐름을 표현했다. 그는 꿈의 공간을 회전시키고, 부서진 시계 무게감으로 관객들의 심정을 요동치게 했다. 무엇보다도 지호는 ‘남아 있는 자아’가 시간을 붙잡으려는 몸짓에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그 과정 속에서 타인의 잊힌 꿈이 품은 희망과 불안이 어우러진 감정의 모자이크가 활짝 펼쳐졌다.
한 시간가량의 연기 후, 류한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았는가? 이 잊힌 꿈 속 불투명한 빈칸들을 우리가 상상으로 메꾸고 감정으로 재현할 때, 단순한 연극 이상의 ‘감정 치유’가 일어난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연기가 단지 예술이 아닌, 마법임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은 무릎을 꿇어 무대 위에 머리를 숙였다. 각자의 상상과 공감이 합쳐져 한편의 살아 숨 쉬는 꿈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한편, 오늘 훈련이 끝난 뒤 학생 중 한 명, 은서가 사라진 꿈의 빈칸을 메우려던 중 알 수 없는 현상과 마주쳤다. 그녀가 연기한 꿈의 한 부분에서 예상치 못한 환상이 꼬리를 물 듯 이물질처럼 떠올랐고, 화면 같은 무대 배경에서 잠잠하던 이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잊힌 기억이 아니라, 어떤 오래된 기록에 봉인된 ‘꿈의 침묵’ — 현실과 꿈의 울타리를 위협할 수 있는 낯선 마력이었다. 몰래 지켜보던 류한 선생님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은서를 무대로 불러 세웠다. 이처럼, 단순한 꿈 연기가 아닌 ‘꿈의 본질’을 탐구하는 여정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긴장과 발견을 동반한다.
그날 밤, 학교 저편 어두운 숲 속에선 꿈이 현실과 뒤섞이는 희미한 속삭임이 감도기 시작했다. 다음 시간부터 꿈 연기자들이 마주할 새로운 미션, ‘꿈의 침묵을 깨우는 자’에 관한 비밀은 이제 막 베일을 벗기 시작한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