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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닌 누군가의 기억을 연기하며 배우는 공감의 깊이

꿈의 무대를 걷다

바람이 잔잔히 불어오는 늦은 오후, 고대의 기와지붕 아래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아에스피라 꿈 연기 학교’의 본관에는 고요하지만 무언가 몽환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이곳은 세상 어느 연기 학교와도 전혀 다른 성격의 장소였다. 학생들은 타인의 기억과 감정을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재현하는 ‘꿈 연기’를 배우며, 그 과정을 통해 타인의 내면에 숨겨진 빛과 그림자를 이해했다. 단순히 역할을 소화하는 연기가 아닌, 완벽한 공감을 바탕으로 타인의 꿈과 아픔을 ‘살아내는’ 예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선생님인 올리비아 마엘은 이 학교의 창립자이자 최고의 꿈 연기 마법사였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언제나 강조했다. “꿈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에요. 꿈은 기억의 가장 깊은 층위와 연결된, 감정의 아주 섬세한 구조물입니다. 너희가 타인의 꿈을 연기할 때, 다른 누군가가 가진 상처와 희망, 두려움과 용기를 그저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온몸으로 느껴야 해요.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날의 수업은 ‘심층 공감 연기’였고, 학생들은 저마다 맡은 이질적인 꿈의 기억을 준비해 무대에 올랐다. 루카는 어린 시절 겪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가족과 헤어진 기억을, 미나는 생전 만난 적 없는 할아버지의 꿈속에서 느낀 그리움을, 그리고 제이드라는 소년은 기억 속에서 지웠던 첫사랑의 눈물을 재현했다. 그들의 꿈은 서로 전혀 다른 세상이자 감정의 파도였지만, 무대 위에서 그들은 일체가 되어 극을 펼쳐 보였다.

올리비아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학생들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꿈을 꿔내는 모든 순간을 분석하는 듯했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꿈의 수학적 암호’를 발견하는 듯했다. 꿈을 연기하는 데 필요한 것은 흔히 말하는 ‘상상력’과 ‘몰입’만이 아닌, 내면 심리구조와 메타인지가 결합된 복합적인 기술이었다. 학생들이 꿈의 구조, 감정의 파장, 기억의 시간 흐름을 깊이 이해할수록 무대는 더욱 실감나고 치유적이었다.

루카가 연기하는 전쟁 속 이별의 꿈에서는 바람이 무대 조명을 스치며 잔잔한 먼지 입자처럼 흩어졌다. 그는 자신이 아닌 타인의 재난과 상실감을 온몸으로 감지해, 진짜 절망과 혼란을 코어 깊숙이부터 불러냈다. 관객석의 학생들은 숨을 죽이며 그의 극을 바라보았다. 순간, 올리비아의 손짓으로 무대가 바뀌고, 이제 미나의 할아버지 꿈 장면이 펼쳐졌다. 따스한 기억 속에서 미나가 무언의 사랑과 세대를 넘어 전해진 가족의 정(情)을 표현할 때, 학생들은 몸에서 전해지는 전율과 눈물이 차올랐다. 그들은 각기 다른 채색을 입은 기억들이 어떻게 꿈이라는 캔버스 위에서 하나로 엮이는지 경험했다.

제이드의 무대는 가장 격렬했다. 첫사랑의 누구도 다 알 수 없는 상처, 마주하기 두려워했던 진짜 감정들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꿈 연기의 마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 세계를 실제 ‘현실’처럼 느끼게 했기에, 관객들은 마치 자신들이 연출되는 꿈속 인물이 된 듯했다. 소년의 얼굴은 떨렸고,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말끝이 흐려졌지만 그 숙련되지 않은 감정의 흔들림조차도 진짜 공감이란 것을 증명했다.

수업이 끝난 후, 학생들은 무대 옆 대기실에서 서로의 경험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꿈 연기의 가장 큰 어려움은 단지 표현하는 것이 아닌 완전한 심리적 동기화였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너무 깊게 상대방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잃어버리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학생들의 불안을 이해하면서도 조언했다: “꿈을 재현한다는 것은 마치 무한한 다차원 공간으로 진입하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은 타인의 기억을 연기할 때, 그 경계와 구분을 분명히 하면서도 그 마음 깊숙이 들어가야 해요. 그 균형을 잡아야만 꿈이 여러분의 감정 치유제가 될 겁니다.”

그날 밤, 학교의 어두운 창가에 걸린 빛바랜 벽시계가 무심히도 시침과 분침을 움직이고 있었다. 학생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으나 마음 속에는 노동과 몰입, 그리고 타인의 세계를 향한 경이로운 여정이 새겨져 있었다. 마법 같은 꿈 연기의 바다에서 누군가의 기억을 연기하며 본연의 ‘자기’를 잃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이들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그들은 무의식 중에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들의 꿈 중 하나가 현실의 틈새를 보고 있었다. 그 꿈은 누군가가 진짜로 잃어버린 기억, 아직 감춰진 미스터리를 암시하는 듯했다. 그저 다음 수업 시간이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그 비밀은, 어쩌면 이 학교가 태초부터 품었고 학생들이 차마 마주하기 두려워했던, 잊힌 자아의 그림자를 드러낼 열쇠가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