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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상처가 담긴 꿈을 연기하며 자기 치유를 배우는 순간

꿈을 연기하는 자들

“넌 오늘 가장 어려운 첫걸음을 뗀 거야.” 희미한 촛불 아래, 하얀 교복은 빛을 흡수한 듯 어둠 속에 잠겼고, 백두현 선생님은 오래도록 잠겨 있던 눈을 부드럽게 뜨며 말문을 열었다. “타인의 꿈을 무대 위에서 재현한다는 건, 단순한 연기가 아니야. 그것은 마음속 심연에 가라앉은 기억과 감정을 꺼내어 접촉하고, 때론 치유하는, 신중한 의식이지.”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반짝이는 꿈 연기 학교의 고대 홀은 어느새 마법의 심연 같은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날, 수업의 주인공은 서윤이었다. 그녀는 마법 학교 최고의 재능을 타고나진 않았지만, 누군가의 꿈을 온전히 재현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섬세한 감정을 끌어낼 줄 아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 개인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솟아난 꿈, 즉 자신의 상처로 가득한 ‘과거’와 마주해야 했다. 요즘 들어 부쩍 밤마다 찾아오는 불길한 꿈이 있었다; 그 꿈속에서 그녀가 갇혀 있던 것은 수많은 단절과 미완의 감정, 어긋난 가족사 속 외로움이었다.

연기 학교에서 가르치는 ‘꿈 재현법’은 단순히 대사를 읊거나 몸짓을 따라 하는 기교가 아니다. 그 꿈을 꾼 이의 서사를 자기 존재 안에 내면화하고, 주어진 무대를 실제처럼 느끼며 그 감각과 정서를 자유자재로 다뤄내는 예술적, 마법적 기술이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감정 동화술’과 ‘심층 심상 투영’을 익힌다. 감정 동화술은 상대의 내면 감정을 비슷하지만 자기 것으로 체험하게 하는 능력이며, 심층 심상 투영은 꿈 안에 있는 형상과 풍경을 현실에 구현하여 현실감 있게 표현하기 위한 마법 기술이다. 서윤은 오늘 이 두 가지를 온전히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에 섰다.

처음에는 꿈을 입체화하는 과정이 서툴렀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상대가 된 듯이 누르는 무거운 응어리를 완전히 끌어올리지 못했다. 무대 위에 펼쳐진 환영은 점점 흐릿해졌고, 머릿속에서 온갖 잡념과 통증이 번잡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학교의 규율은 엄격했기에 서윤은 멈출 수 없었다. “멈춘다면 치유는 시작되지 않아, 불완전한 채로 남은 기억이 다시금 너를 위협할 테니까.” 백두현 선생님은 안타까움과 기대를 동시에 담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눈을 감고 스스로의 심연으로 깊게 잠기며, 서윤은 다가오는 꿈속 인물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그 인물들은 모두 실재했던 가족들이었다. 아버지의 그늘, 어머니의 무심, 그리고 언니의 냉담함 같은 것이 꿈의 무대에 돌연 돌연 분리된 조명 속에서 살아 숨 쉬었다. 서윤의 기초 마법인 ‘심장 파동 수렴법’이 서서히 활성화되자 그녀의 몸 안 깊은 곳에서 빛과 음파 같은 에너지가 모여 사람의 얼굴 형태를 이루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 속 안개 낀 미소처럼 희미하고도 섬세했다.

서윤이 그 인물 하나하나의 말투, 몸짓, 심지어 숨결까지 온전히 재현해 나가자, 관객처럼 지켜보던 동료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얼굴에도 점점 변화가 일었다. 무슨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연민과 이해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스며 나왔다. 이 연극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는 이와 연기하는 이 모두가 함께 고통, 슬픔, 그리고 회복을 경험하는 신비한 의식이었다.

내면의 상처를 재연하는 과정에서 서윤은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감정의 파고가 올라올 때마다 자기 자신을 밖에서 바라보는 듯한 ‘감정 객관화술’을 활용했다. 그녀는 어둡고 무거운 감정의 층을 한 겹씩 벗겨내며, 그 뒤에 숨은 진실과 마주했다. 그 안에선 아버지의 무뚝뚝함에 대한 오해, 말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고된 사연, 진심을 감춘 언니의 애틋함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이탤릭체로 변한 ‘꿈 무대’는 점점 더 생생해졌고, 소리와 정취가 귓가를 메우며 현실과 꿈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서윤의 정신이 너무 깊이 들어가면서 무대 위에 요동치는 감정의 파도가 한 순간 강렬한 폭풍으로 변했다. 마음속 유년의 열병처럼 번뜩이는 두려움, 원망, 그리고 마침내 폭발적인 용서의 불길이 무대를 태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녀 자신이 그 꿈의 주인공이자 해석자이며, 치료자였다.

마침내 무대가 고요해지고, 그 안에 담긴 심상들은 아늑한 빛으로 변모했다. 서윤은 눈을 뜨며 깊은 숨을 내쉬었고, 그간 쌓였던 무거운 감정의 굴레가 한껏 해소되는 듯했다. 긴장이 풀린 표정 위로 백두현 선생님의 맑은 미소가 흘렀다.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네가 바로 ‘꿈의 연기자’, 치유자의 길을 걷게 될 이유다.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일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이 길 끝에 빛나는 진실과 평화가 있다.”

서윤이 무대 밑으로 내려오는 순간, 고요했던 주변이 서서히 소란스러워졌다. 이번 실습은 단순한 과제가 아니었다. 심연에 묻힌 누군가의 기억과 감정을 드러낸 그녀의 무대는 여러 학생에게 깊은 울림을 주며, 모두가 각자의 내면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한편에서는 이들의 꿈을 빼앗으려는 어둠의 존재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법 학교가 새롭게 맞닥뜨리지 않고는 넘어설 수 없는 시련의 전조였다.

학원 연수 실기장을 가득 메운 무형의 공기처럼, 희미한 긴장감은 아직 풀리지 않은 상처들 사이로 살며시 밀려들었다. 꿈을 연기하는 자들에게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시험’이 다가올지 모른다는 예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다.